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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6 18:13

아이폰 개발 뒷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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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red의 08년 1월 기사 "The Untold Story: How the iPhone Blew Up the Wireless Industry" 를 애플포럼의 casaubon님(http://casaubon.tv/)이 번역한글...

http://www.appleforum.com/mac-column/53674-iphone-%EA%B0%9C%EB%B0%9C%EC%9D%98-%EB%92%B7%EC%9D%B4%EC%95%BC%EA%B8%B0.html

http://www.wired.com/gadgets/wireless/magazine/16-02/ff_iphone?currentPage=all (--> Wired 원문보기)

데모는 잘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2006년 가을, 늦은 오전이었다. 거의 한 해 전,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 제작에 200여명의 애플 엔지니어들을 소집하였다. 애플 내 최고 수준의 엔지니어들이었다. 하지만 애플 이사회의실 안에 들어온 아이폰 프로토타입은 여전히 재앙적인 수준이었다. 버그가 많았다. 잘 돌아가지 않았다. 전화도 계속 끊겼고 배터리 또한 완충 전에 충전이 멈출 정도였다. 데이터와 애플리케이션 또한 사용이 불가능했다. 문제점은 끝이 없었다. 데모 마지막 순간, 잡스는 십 수번의 지적을 하고는, 방 안 사람들을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물건이 못나왔구만."

잡스의 트레이드마크인 짜증 이상의 공포감이 감돌았다. 직원들에게 고함을 지르는 애플 CEO도 무섭기는 하지만, 으레 그러려니 하면 된다. 하지만 CEO께서 이번만은 대단히 차분하고 조용히 말했었다. 이 회의에 참가했던 한 직원의 말이다. "애플에 들어와서 이번만큼 으스스했을 때가 거의 없었어요."

결과는 심각했다. 아이폰은 매년 열리는 맥월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물건이었고, 몇 달 뒤 출시를 해야 했다. 1997년 애플 복귀 이후, 잡스는 맥월드를 활용하여 주력 제품을 선보여왔고, 애플 소식통들은 언제나 맥월드를 손꼽아 기대해왔다. 잡스는 이미 차세대 맥 OS, 레퍼드의 연기를 인정한 상태였다. 아이폰마저 준비가 안된다면 맥월드는 김빠진 맥주였다. 비판자들이 달려들 테고, 주가도 폭락할 것이었다.

AT&T는 또 어떻게 생각할까? 1년 반에 걸친 비밀회의 끝에 잡스는 마침내 AT&T의 휴대폰사업부(당시는 Cingular였다)와 계약을 끌어낼 수 있었다. 5년간의 독점판매권은 판매의 약 10%를 AT&T 스토어에서 하고, 아이튠스 수입의 약간을 넘기면서 잡스에게 전에 없던 권력을 쥐어주는 계약이었다. 그는 일전에 AT&T를 부추겨서 신기능, 소위 비쥬얼 보이스메일을 개발하도록 시키고, 휴대폰 등록 과정 시간을 단축시키도록 하였다. 이것만으로도 AT&T는 수 백만 달러와 수 천 시간의 수고를 들여야 했다. 게다가 잡스는 독특힌 수입-배분을 고집했다. 아이폰 고객의 AT&T 통신요금 10%를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아이폰 디자인과 제조, 마케팅을 애플이 완전히 통제하겠다는 조항도 물론이다. 실로 잡스는 가늠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 제일 거대한 휴대폰 업체를 상대로 유리한 협상을 끌어낸 것이다. 이제 그가 할 일이라고는 시한 지키기 뿐이었다.

즉, 아이폰 작업 실무자들로서, 향후 3개월은 제일 스트레스가 많은 기간이 되리라는 의미였다. 시한을 지키라는 소리가 복도까지 연일 들릴 정도였다. 밤새 코딩을 해서 피곤해 하는 엔지니어들은 잠만 보충하고 다시 합류했으며, 한 제품관리자는 사무실 문을 너무나 세게 닫아서, 손잡이가 부러지고 갇혀버린 적도 있었다. 1시간 뒤에야 동료들이 와서 알루미늄 뱃트로 그녀를 구해낼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압력 끝에, 2006년 12월 중순(맥월드 열리기 불과 수 주일 전), AT&T에 보여줄 프로토타입이 나올 수 있었다. 그는 AT&T의 보스, 시그맨(Stan Sigman)을 라스베가스의 Four Season 호텔에서 만났고, 아이폰의 훌륭한 화면과 강력한 웹브라우저, 매력있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보여주었다. 과묵한 텍사스 사나이 시그맨은 미국의 거대 전화통신업체에 만연한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아이폰을 본 뒤, "내가 이제까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최고다"라 말할 정도였다. (이런 저런 뒷이야기는 아이폰 제작에 관여한 이들로부터 입수하였으며, 애플과 AT&T는 특정 내용이나 회의에 대해 확인해주지 않을 것이다.)

여섯 달 뒤인 2007년 6월 29일, 아이폰이 발매된다. 분석가들은 2007년 말까지 300만 대 정도 팔려나가지 않겠나 말했었다. 이는 최고로 빨리 팔려나간 스마트폰이라는 얘기였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아이폰은 제일 이윤이 남는 애플 기기이기도 하다. 399달러짜리 아이폰 당 80달러 씩의 이윤을 올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 약정 AT&T 요금 240달러도 있다. 게다가 아이폰 구매자의 약 40%는 새로 AT&T를 선택한 이들이었으며,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와 같은 도시에서 AT&T의 데이터 트래픽은 3배가 더 늘어났다.

분명 아이폰은 애플과 AT&T 양사의 효자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그 진짜 충격은 110억 달러 어치의 미국 휴대폰 산업에 있었다. 그동안 통신사들은 휴대폰 제조사들을 농노 취급해왔다. 통신망을 담보로, 휴대폰 사양이나 비용, 기능을 모두 일일이 통제해 온 것이다. 이들은 휴대폰을 손해보고 파는 싸구려 물건 취급하였다. 게다가 대량의 보조금으로 이용자들을 통신사 요금제에 묶어 놓았다. 그리고 아이폰은이러한 힘의 균형 상태를 깨버렸다. 통신사들은 비싸다 하더라도 잘 만들어진 휴대폰만 있으면 고객을 유치하고 수입도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제 통신사의 마음이 아니라, 소비자의 마음을 끌 만한 휴대폰 제작 경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각 제조업체들은 애플과 같은 계약을 하려하고 있다. Piper Jaffray의 증권분석가 올슨(Michael Olson)의 말이다. "아이폰은 이미 통신사와 제조업체의 지형을 뒤바꾸고 있습니다."

첫 아이포드가 나온지 얼마 안된 2002년이었다. 그 때부터 잡스는 휴대폰 개발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수 백만 명의 미국인들은 휴대폰과 블랙베리, 이제 MP3 플레이어까지 따로 따로 들고다니고 있었다. 소비자들은 당연히 한 개만 들고다니고 싶어한다. 그는 앞으로 휴대폰과 휴대용 이메일기기, 그리고 더 많은 기능이 합쳐져서 아이포드의 지위를 위협하리라 생각했다. 아직 새로운 아이포드 라인을 지키기 위해, 잡스는 결국 휴대폰 사업에 진출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

개념이 이렇게 확실하다면, 장애물도 확실했다. 데이터 통신망은 느리고, 휴대용 인터넷 기기용으로 준비도 안되어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운영체제가 아이폰에게 필요했다. 아이포드 OS는 복잡한 네트워킹이나 그래픽용으로는 충분하지 못했고, 오에스텐을 작게 만들어도 휴대폰이 다루기는 거추장스러울 정도였다. 게다가 경쟁도 강력했다. 2003년, 소비자들은 Palm Treo 600과 블랙베리에 몰렸다. Palm Treo 600은 PDA와 휴대폰을 합쳤고, 블랙베리 역시 단일 패키지였다. 소위 컨버전스의 수요가 있다는 의미였다. 애플 엔지니어들이 넘어서야 할 벽이 또 있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통신사 문제도 있었다. 통신사가 휴대폰의 모든 것을 지시내린다는, 휴대폰을 통신망 가입을 위한 미끼 정도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잡스도 알고 있었다. 통제에 관한 한 악명높은 잡스다. 양복쟁이들(group of suits)에게 아이폰 디자인을 맡길 사람이 아니다.

2004년, 애플의 아이포드 사업은 날로 중요성을 더해갔다. 하지만 전에 없이 취약한 부분도 늘어났다. 아이포드가 애플 수입의 16%를 차지했지만, 당시 3G 휴대폰들이 인기를 얻는 중이었다. Wi-Fi 폰도 곧 나올 태세였으며, 스토리지 가격은 떨어지고, 뮤직스토어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지배적인 뮤직플레이라는 위치가 위험해 보였다.

그 해 여름, 잡스는 공개적으로 애플폰을 개발하고 있지 않다 말하였지만, 그는 휴대폰 산업 진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통신사를 우회하기 위해 그는 모토로라에 접근하였다. 손쉬운 전략처럼 보였다. 모토로라는 RAZR로 유명했고, 모토로라 CEO, 잰더(Ed Zander)와 잡스는 잰더가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에 있을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 애플은 뮤직소프트웨어 개발에 집중하였고, 모토로라와 통신사인 Cingular는 복잡한 하드웨어 개발에 집중하였다.

잡스 계획에 따르면, 모토로라는 당연히 RAZR의 멋진 후계 기종을 내보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플과 모토로라, Cingular는 거의 모든 것을 흥정했다. 노래가 들어가는 방법과 저장 방법, 심지어 회사 이름을 어떻게 표시하는 것까지 모든 것이었다. 첫 번째 프로토타입은 2004년 말에 나왔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있었다. 휴대폰 자체가 못생겼다.

2005년 9월, 잡스는 태연자약하게 로커(ROKR)를 선보인다. 그는 로커가 "휴대폰용 아이포드 셔플"이라 소개하였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잡스는 로커가 별로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소비자들도 나름 로커를 증오하였다. 음악을 직접 다운로드할 수 없고, 100곡만 넣을 수 있었던 로커는 순식간에 미국 휴대폰 산업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를 드러냈다. 소비자들은 뒷전이었다. 본지는 2005년 11월, 커버스토리를 통해 휴대폰 산업이 어느 정도로 엉망진창인지 알린 바있었다. "YOU CALL THIS THE PHONE OF THE FUTURE?"



The Apple Touch
애플은 두 대의 뮤직폰을 개발하였다. 하나는 2005년, 모토로라와 합작한 로커다. 로커는 전통적인 휴대폰 제조업체와 통신사의 관계였다. 하지만 2007년 여름에 나온 아이폰은 애플이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로커는 생산에 들어갔지만, 잡스는 역시 휴대폰을 직접 만들어야겠노라 깨닫게 된다. 2005년 2월, 그는 Cingular와 함께 모토로라 없이 둘만의 파트너쉽을 꾸린다. 맨하탄의 한 호텔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잡스는 Cingular 중역들에게 자기 계획을 털어놓는다. 이 자리에도 시그맨이 있었다. (2006년 12월, AT&T가 Cingular를 인수할 때에도 시그맨은 사장으로 남아 있었다.) 잡스는 세 문장으로 된 메시지를 남겼다. 첫 번째. 애플은 경쟁사를 수 년은 앞설, 정말 혁명적인 기기를 만들 기술을 갖고 있다. 두 번째. 애플은 협상을 위해 당신들에게 독점판매권을 고려할 준비가 되어있다. 세 번째. 하지만 애플은 아예 통신사로 나설 준비도 되어 있다.

그럴 이유가 있었다. 애플 하드웨어 엔지니어들은 1년간 타블렛 PC용 터치스크린 기술을 연구해오고 있었다. 이들덕분에 잡스는 휴대폰용 인터페이스도 유사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게다가 ARM11 칩이 나온 덕에, 휴대폰 프로세서는 마침내 휴대폰과 컴퓨터, 아이포드 기능을 한데 다룰 만큼 빨라지고 효율성을 갖추게 되었다. 게다가 무선통신비도 저렴해서 애플이 이를 소비자에게 되팔 수 있었다. 이미 Vergin이 그런 사업을 하고 있었다.

시그맨과 그의 팀은 즉각 아이폰 제작에 뛰어든다. Cingular의 전략도 다른 통신사와 다르지 않다. 소비자들이 휴대폰을 더 많이, 휴대폰 상의 웹접근을 더 많이 해 주기를 바랬다. 음성 통신 사업은 쇠락중이었다. 가격경쟁이 마진을 하락시켰기 때문이다. 음악과 비디오를 직접 다운로드하고, Wi-Fi 속도로 인터넷을 누린다면, 아이폰은 데이터 통신망 사용자를 늘릴 수 있었다. 음성이 아닌 데이터다. 데이터의 마진이 훨씬 높다.

더 있다. Cingular 팀은 휴대폰 사업 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보고 있었다. 통신사들은 통신망을 소중한 보물인양 다루고, 휴대폰은 그저 거들 뿐이라는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전략이 그들을 배불렸다. 저렴한 휴대폰을 사도록 보조금을 지급하면, 신규 가입자를 끌기 더 쉬워진다. 이들을 장기 약정으로 묶으면 꾸준한 수입을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휴대폰 인터넷 접속은 이제 사치가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게다가 통신사 최대의 난제는, 신규 고객 확보가 아니라 상대방 고객 뺏어오기이다. 저렴한 휴대폰만으로는 안된다는 얘기이다. 시그맨과 그의 팀은 가입자들이 정말 반할 휴대폰, 다른 통신망에서는 못쓰는 휴대폰을 원했다. 잡스 아니고 누가 그런 휴대폰을 만들리?

Cingular 입장에서 애플의 야망은 감질나는 한편, 신경을 거슬리기도 하다. 아이포드 메이커와의 화기애애한 관계라면 AT&T에게 섹시함을 안겨다줄 수 있다. Cingular가 거절할 경우, 잡스를 분명 받아드릴 회사는 또 있다. 게다가 잡스가 자기 아이디어를 원하는 곳 어디에라도 팔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했었다. 그러나 일찌기 잡스가 원하는 융통성과 통제력을 허용한 통신사는 없었다. 시그맨은 잡스의 제안에 대해, 이사진을 설득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시그맨이 옳았다. 협상은 1년을 더 끌었다. 시그맨과 그의 팀은 자기네가 너무 양보하는지 계속 의문스러워 하였다. 이 때 잡스는 Verizon 중역진도 만났는데, 이들은 즉각 거절하였다. 그들을 탓하기는 어렵다.

그동안 통신사들은 독점적인 통신망을 통해 서비스를 판매하여 소비자들에게 요금을 부과해왔다. 잡스에게 통제권을 그렇게 많이 주어버리면, Cingular는 고가의 통신망을 단순한 콘텐트 전송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꼴이 된다. 시그맨의 팀은 간단히 내기를 걸었다. 아이폰이 데이터 트래픽을 더 많이 일으키면, 콘텐트 협상에서 잃은 수익 이상을 채워주리라는 내기였다.

잡스는 협상의 상세한 부분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2005년 추수감사절 즈음, 그러니까 최종 계약이 성사되기 8개월 전이다. 이 때 그는 엔지니어들에게 지시하여 최대한 속도를 내도록 시켰다. Cingular와의 협상과는 별개로 엔지니어링과 디자인 면에 있어서의 장애도 만만하지 않았다. 우선은 운영체제 문제가 있었다. 애플 폰 개념을 착안한 2002년 이래 모바일 칩은 성장하였고, 이론상 맥 OS를 지원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상당한 재작성과 간소화가 필요했다. 아이폰용 OS는 수 백 메가바이트이어야 했다. 오에스텐 1/10 크기다.

아이폰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 잡스와 애플 내 최고 중역들은 이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했다. 엔지니어들은 신중하게 리눅스를 고려하였다. 이미 휴대폰용 리눅스가 쓰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들의 소프트웨어 쓰기를 잡스는 거부하였다. 그래서 애플은 일단 프로토타입 휴대폰을 만들고, 아이포드 안에 임베딩하여, 클릭휠을 다이얼로 만들었다. 이 때는 숫자 선택과 통화에만 쓰였다. 인터넷용은 안되었다. 2006년 초, 애플 엔지니어들은 드디어 오에스텐을 인텔칩용으로 만들어냈고, 이내 아이폰용 오에스텐의 재작성에 들어갔다.

어떤 운영체제를 써야하냐는 논의가 익숙한 곳이 애플 중역 회의다. 하지만 안테나 디자인이라든가, 라디오-주파수 방열(radiation), 통신망 시뮬레이션 등, 휴대폰에 대해서만은 준비가 덜되어 있었다. 아이폰의 자그마한 안테나가 효과적으로 제 역할을 수행하는 작업에만, 수 백만 달러 어치의 구매와 로봇-장비 실험실이 필요했다. 발열 실험을 위해서는 아교로 만든 인간 머리 모형까지 제작하였다. 통신망 퍼포먼스 측정을 위해서는, 역시 수 백만 달러를 들여 십 수 곳의 서버-크기 라디오-주파수 시뮬레이터를 사들일 정도였다. 심지어 아이포드로 익힌 디자인도 아이폰 화면 제작에는 별 도움이 못 되었다. 잡스 자신이 프로토타입을 움직여보고 발견한 사실이었다. 스크래칭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는, 터치스크린을 아이포드와 같은 플라스틱이 아니라, 유리로 만들어야 한다. 한 내부인에 따르면, 아이폰 제작에 애플이 거의 1억 5천만 달러를 썼으리라 한다.

이 온갖 과정 내내, 잡스는 비밀을 유지시켰다. 내부적으로 이 프로젝트는 P2로 불리었으며, 이 의미는 Purple 2였다. (포기한 아이포드 폰이 Purple 1이었다.) 팀도 애플의 캘리포니아 쿠퍼티노 캠퍼스 안에 쪼개져 있었다. 애플 중역들도 Cingular로 출장갈 때마다, 애플이 아이폰 트랜스미터를 만들 때 사용한 이름인 Infineon사의 직원으로 등록을 시켰다. 심지어 아이폰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팀도 분리되어 있었다. 하드웨어 엔지니어들은 가짜 소프트웨어로 가득찬 서킷으로 작업하였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은 나무상자에 놓인 서킷보드 상에서 작업을 하였다. 2007년 1월, 잡스가 맥월드에서 아이폰을 선보였을 때, 실제로 작동하는 아이폰을 이전에라도 본 사람은 각 책임자와 중역 등 서른 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느님이 도우사 아이폰이 워낙 성공했기에, 아이폰의 불완벽성이 가려지기 쉽다. 첫 가격인 599달러는 너무 높았다. (나중에 399달러로 떨어진다.) 아이폰은 AT&T의 느린 EDGE 통신망에서 돌아갔다. 이메일 검색이나 비디오 녹화도 불가능하고, 브라우저도 자바나 플래시는 못돌린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문제가 안 되었다. 아이폰 크래킹이 금세 일어나 다른 통신사에서도 쓸 수 있게 되었고, 개발자와 심지어 업체들까지 뛰어들었다. 소비자들은 쓰기 쉬운 휴대용 컴퓨터를 구입하였고, PC의 발전에 따라, 아이폰은 보다 강력해질 개발의 파도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2월경 잡스는 개발킷을 공개하여, 누구나 아이폰용 프로그램을 작성할 수 있도록 할 참이다.

이제 휴대폰 제조업체들도 아이폰 덕분에 통신사들에 대해 협상력을 갖게 되었다. AT&T가 자기네 가입자들을 빼앗는 광경을 본 통신사들은 이제 경쟁력 있는 기기를 찾아나서는 중이다. 게다가 기꺼이 권위를 좀 내줄 모양새이기도 하다. 제조업체들은 이제 제품에 대해 보다 많은 통제력을 갖게 될 것이다. 가입자들도 이제 보다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애플리케이션 개발자들도 이제 통신사들이 통신망에 대한 장벽을 조금씩 누그러뜨리면서, 보다 많은 기회를 얻게 된다. T-Mobile과 Sprint는 구글 Android(독립 개발자가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더 쉽게 만들 수 있는 운영체제)와 파트너쉽을 맺었다. 제일 완고한 통신사 중 하나인 Verizon도 11월경, 통신망을 개방시켜서 호환되는 휴대폰을 써도 좋게 하겠다는 발표를 하였다. AT&T도 며칠 뒤 유사한 발표를 하였다. 결국은 완전히 새로운 휴대폰 환경이 도래한다는 의미다. 즉, 어떤 휴대폰, 어떠한 통신망에서도 돌아갈 애플리케이션이 나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더 많은 융통성과 인터넷 기능이 휴대폰에 추가될 것이다.

통신사의 악몽이 재현된 것 같기도 하다. 아이폰이 권력을 소비자에게, 개발자에게, 핸드폰 제작사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통신망은 이제 단순한 전깃줄에 불과하게 된다. 하지만 보다 혁신을 북돋으려면, 통신망 자체의 가치가 더 높아져야 한다. 소비자들이 휴대폰에 더 많은 시간을 쓸수록, 통신망에도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즉, 통신 요금은 더 올라가고, 모든 수입도 더 올라갈 것이다. AT&T의 마케팅 수석, 로스(Paul Roth)의 말이다. "우리는 시장을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그동안 통신사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시나리오야말로, 통신사들에게 절실하다는 의미다. 스티브 잡스가 나서서야, 그들이 이 교훈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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